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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의 정의와 북한과 남한 고고학의 역사

코인 투자 정보 블로그 발행일 :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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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고 자료를 분석해 당시의 문화나 이념 등을 파악하는데 힘써왔다. 고고학은  과거 인류가 어떻게 변화하고, 왜 변화했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며,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가 고고학자이다.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고고학이란?

고고학은 과거 인류들이 남긴 물질적 자료를 통해 당시의 문화, 행위, 조직, 이념 등을 복원하고 그들의 문화가 어떻게 왜 변화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걸 연구하는 학자가 고고학자다. 인류 이전의 생명의 역사를 연구하는 고생물학과는 엄연히 다른 학문이다. 사람들이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아주 흔한 일이다. 고고학자가 꿈이라는 아이들을 발굴체험을 시키면 십중팔구 "공룡은 언제 찾으러 가요?"가 튀어나온다. 이게 꼭 국내 이야기만은 아니라서, 신기한 스클버스 같은 외국 애니에서도 고고학 얘기하는데 화석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인 선사시대의 유물을 다루는 분야인 선사고고학이, 형질인류학이나 고인류학 등 사실상 고생물학에 가까운 분야와 다루는 시기가 겹쳐서 상호 간에 접점이 많기 때문이고,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고고학이라고 하면 선사고고학을 많이 떠올리기 때뮨이다.

 한국 고고학의 역사

근대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이 국내의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과거의 유물과 유적에 대한 관심은 매우 낮았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금기의 끝판왕이므로 가슴 도굴사건이 나고서 복구하거나, 도굴당해 버려진 고구려 왕릉 내부 구경 후 벽화 등에 대해 감상문을 남기는 정도의 기록이 남는 정도였고, 유적을 발굴한다 해도 기술적인 한계점이 많았다 보니 한백겸이 고구려 시대에 건축된 평양 궁성 유적을 보고서 이를 고조 선대의 유적으로 착각해서 한 동안 해당 유적이 기자의 정전으로 알려지기도 했었다. 예외적으로 추사 김정희는 진흥왕 순수비를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신라 진흥 황릉 고를 통해 진흥왕릉의 위치를 전진 흥왕 릉 대신 서악동 고분군으로 비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에 밝혀진 성과와도 부합한다. 그러나 김정희의 활동은 개인적이었고 당대에 끊어져 고고학이 자생할 바탕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최초의 근대적인 고고학 연구는 1905년 을사조약 전후로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 학자들의 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시기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 강제병합 이후로는 일본인들이 모든 고고학 자료를 독점하게 된다. 이들은 새로 일본 딸이 된 조선 전역의 유적을 일제히 조사하여 조선 고적 도보를 편찬했다. 일제는 특히 식민사관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고자 먼저 가야 지역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해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일본 고고학계의 낮은 발굴 수준으로 사실상 도굴이나 다음 없는 작업들이 행해졌도, 많은 경우 제대로 된 보고서도 작성되지 않았다. 임나일본부의 증거로 쓸 만한 부분을 찾지 못한 일본인들은 이번에는 평양의 낙랑 유적으로 눈을 돌려 한사군 유적을 발굴해 한국이 고대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결국 일본 학계의 연구는 한국의 선사시대의 변천을 신석기에서 금석병용기로 변한다는 식으로 다루었으며, 석기만 쓰다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철기를 받아오면서 성장하는 식으로 중국과 일본이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던 시도에 불과했다. 이외에 유적지 밀도가 월등히 높고 금관 같은 주목할 말한 간판 유물이 나온 경주시도 상당히 관심을 받았으나 그 외 나머지 지역은 일제 학자들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였고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빈틈을 노려 일본인 중 가루베 지온 같은 자는 일제 정부의 주목을 덜 받던 공주시 지역에서 사실상 무차별 도굴에 가까운 활동을 수년간 지속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인 학자들이 한반도의 고고학을 독점하고 조선 사람은 그저 인부로만 동원됐다 보니, 해방 이전에는 제대로 훈련받은 한국인 고고학자가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30년대 도유호, 한흥수, 김재원은 각각 비엔나, 프라하, 뮌헨 대학에 유학해 고고학을 공부했다. 도유호는 해방 이후 한흥수와 더불어 북한행을 택하고 북한 고고학계를 발전시킨다. 북한은 모든 토지가 국가의 소유였기 때문에 발굴에 용이했고, 선사시대의 무계급 이상 사회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고고학 연구 환경이 용이했다. 북한 고고학계는 한반도에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는 과거 일본의 연구를 반박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50~60년대 북한은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증명하고, 도유호는 한국 최초의 고고학 개설서를 출간한다. 그러나 70년대 김일성 유일체제가 들어서며 모든 학문적 토론은 중단되고 현재까지 그 해석을 담습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남한의 고고학은 북한의 고고학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겼었는데 고고학 발굴을 위한 자금 확보 문제나 토지권 해결 문제 등이 있었고 무엇보다 인재가 부족했으며 고고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김재원은 해방 이후 미 군정하에서 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하고 국립 박물관을 건립한다. 김재원은 광복 직후, 아직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던 일본인 고고학자 아리미스 교이치를 붙잡고, 그와 함께 1946년 호우총과 은령총을 발굴했다. 1959년 약탈 문화재 반환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에 왔던 황수영 교수는 우연히 일본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일본 고대 절터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김정기 선생을 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재원은 김정기에게 편지를 보내 귀국해 국립박물관에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 요청을 승낙한 김정기는 귀국 후 국립박물관에 들어가 건축학을 바탕으로 한국 고고학에 큰 기여를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남한 고고학은 말만 고고학이지 발굴 수준은 그저 땅을 파헤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일본에서의 발굴 경험을 바탕으로 실측과 여러 기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던 김정기는 남한 고고학에 실측 개념을 도입하고 고대 건축물의 발굴과 해체를 가능케 했다. 또 1961년 김원용이 서울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고고인류학과를 개설해 고고학을 강의하고 뒤이어 다른 대학과 국가 기관에서 고고학 조사를 시작하며 연구 인력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70년대 초에는 편년 체계의 큰 틀이 캊추어지고, 60년대 학번들이 해외 유학에서 돌아오며 세계 고고학 사조를 국내에 알리기도 했다. 무령왕릉 졸속 발굴 사건이란 큰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워낙 충격적이었던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후에는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는 체계가 갖추어지고, 경험이 쌓이면서 남한의 고고학 연구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활기를 더욱 띄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일 체제 이후 발전이 멈춘 북한의 고고학과는 비교를 불허할 수준으로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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